돈이 권력이 되어버린 시대
고가의 외제차를 모는 남성이 좁은 골목길에 진입하며 길을 비켜주는 오토바이 배달원에게 심한 욕설을 한 뉴스가 보도되었다. 욕설을 한 이유는 좁은 길목에 자기 차가 지나가기에 여의치 않자 화풀이 대상으로 그 옆을 지나가는 생판 남인 배달원에게 욕을 한 것이다. "법만 없으면 차로 밀어버리겠다.", "네 자식도 배달 일 하고 살아라." 등 입에 담기 심한 말을 하고 지나갔다. 해당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있는 현 세태와 돈이 권력인 된 시대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과거 빈부격차 탓에 무시당했던 일화를 살펴보자.
무신 차별이 극에 달했던 고려
무신정변(武臣政變)은 고려 18대 의종 때 무신들이 일으킨 정변이다. 고려 초기부터 무신은 같은 귀족 출신인 문신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았다. 고려 초기 이름난 장수 강감찬(姜邯贊), 서희(徐熙)도 문관 출신이라는 점에서 무관의 입지는 크지 않았다. 더욱이 문관이 경제권을 장악하면서 무신들에게 나눠줄 군인전(軍人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170년 의종은 보현원 행차 도중에 무신으로 하여금 오병수박(五兵手搏) 놀이를 하도록 시켰다. 오병수박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 보며 손으로 힘과 기술을 겨루는 놀이로 고구려시대부터 계승되어 현재 씨름으로 발전하였다.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이 젊은 군인을 상대로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자, 문신 한뢰(韓賴)가 그의 뺨을 때리며 조롱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 등은 이 소식을 듣고 보현원에 도착했고 그 자리에 있었던 무관을 제외한 모든 신하를 살해함으로써 반란이 시작되었다. 무신들은 "무릇 문관(文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도 죽여서 씨를 남기지 말라"라고 하며 많은 문신들을 살해했다. 그 후 고려는 무신이 지배하는 무신정권 100년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몰락한 왕족에 대한 차별을 참아야 했던 흥선대원군
조선은 정조(正祖) 사후 외척이 권력을 손에 넣으며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었다. 외척인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에 따라 권력이 움직였으나 훗날 안동 김씨가 권세를 장악하게 된다. 안동 김씨는 허수아비 왕이 필요했고 조선 왕족 이씨 중 왕의 자질을 갖춘 이는 어떠한 누명을 씌워서라도 죽이거나 유배를 보냈다. 그중 훗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으로 불리는 이하응(李昰應)도 목숨을 부지하는데 사력을 다했다. 흥선대원군은 고종(高宗)의 아버지이다. 그는 안동 김씨의 감시를 피하고자 방탕한 생활을 했다. 권세가문의 상갓집을 찾아다니며 술을 얻어먹었고 상갓집 개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의 잔치에 참석했을 때 양반들이 가랑이를 지나가면서 술을 주겠다고 했다. 이 때문에 흥선은 세도가문 양반의 가랑이 아래로 지나는 치욕을 참아야 했다. 흥선은 안동 김씨에 반감 있던 세력들을 모아 아들을 왕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어린 고종이 왕이 되고 권력을 가진 흥선은 그동안 세도가문이 아무렇게나 휘둘렀던 권력을 빼앗고 조선의 무너진 체제를 회복하는 데 주력했다. 안동 김씨는 과거 흥선을 함부로 대한 이유로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본주의 시대는 부가 곧 권력인 시대가 되었다.
과거 부와 권력을 바탕으로 함부로 휘둘렀던 사람의 결말이 어땠는지 역사가 말해준다.
역사적 인물에 관한 글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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