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표 이준석 공개 지지, 과거 루스벨트와 닮은 정치?
홍준표 전 대구시장 이준석 지지하며 국민의힘 당혹시키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이 “이준석에 대한 투표는 사표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밝히면서 보수 진영의 내부 균열이 더욱 뚜렷해지고 있습니다. 정계 은퇴 선언 후 하와이에 머물던 홍 전 시장의 공개 발언은 이준석 후보 지지로 해석되며,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한동훈 전 대표와 박정훈 의원 등 친윤계 인사들이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김문수 후보 측도 당혹감을 표했지만, 일부 인사는 홍 전 시장의 발언을 포용적 메시지로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후보 단일화가 답보 상태인 가운데, 홍 전 시장의 발언은 범보수 진영의 복잡한 지형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홍준표 전 시장은 어떤 생각으로 이같은 행동을 했는지 그 선례를 살펴봅시다.
루스벨트 대선후보에서 패배하며 독자노선을 걷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01년부터 1909년까지 미국 대통령직을 수행한 후, 자신의 후계자로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지명하며 정권을 이양했습니다. 그러나 태프트 행정부가 점차 보수적으로 기울자 루스벨트는 그의 정책 방향에 강한 불만을 품게 되었고, 두 사람의 정치적 결별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습니다.
1912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루스벨트는 당내 보수 세력의 지지를 받은 태프트에게 패하며 낙마했으나, 이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적인 제3당, 즉 진보당(Progressive Party) 을 창당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불 모스(Bull Moose)처럼 건강하다"라고 말한 일화에서 따와, 새로 만든 정당은 '불 모스당'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습니다. 이 당은 루스벨트의 개혁 정신과 대중적 인기를 결합한 조직이었으며, 기존 양당 체제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대안 세력으로 급부상했습니다.
진보당을 지지하며 돌풍을 일으킨 루스벨트
루스벨트가 이끈 진보당은 1912년 대선에서 기존의 공화당과 민주당에 맞서 강력한 개혁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노동시간 단축, 아동노동 규제, 여성참정권 보장, 사회보험 도입, 대기업 규제, 직접 민주주의 강화 등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정책들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여성참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한 최초의 주요 대선후보였으며, 이로 인해 여성 유권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선거 유세 도중 루스벨트는 암살 시도를 당했으나, 총상을 입고도 피를 흘리며 연설을 이어가는 강인함을 보여 대중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27.4%의 득표율과 88명의 선거인단을 확보, 제3당 후보로서는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기록했습니다.
반면, 공화당의 태프트는 23% 득표에 그쳐 3위로 밀려났고, 민주당의 우드로 윌슨이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루스벨트와 진보당이 일으킨 이 돌풍은 미국 정치사에 큰 전환점을 남겼으며, 이후 뉴딜 정책 등 진보적 개혁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진보당은 단명했지만, 루스벨트는 이 대선을 통해 개인의 신념과 대중의 지지를 결합한 정치 운동이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인물로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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