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한국에 준 선물에 국민의 힘 인사들에게 불똥 튀다
엔비디아가 한국 정부·기업에 최신 블랙웰 GPU 26만장을 공급하기로 하면서, 대선 당시 이재명 대통령의 ‘GPU 5만장 확보’ 공약을 “실현 불가능”이라 비판했던 국민의힘 인사들의 발언이 재조명되고 있다. 조국 조국혁신당 비대위원장은 2일 SNS에서 나경원 의원의 당시 발언을 지목해 강하게 비판했다. 나 의원은 지난 4월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수출통제 하 전략무기”라며 이 후보의 외교노선으로는 확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지난달 31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APEC 계기 한국 정부와 삼성·SK·현대차·네이버 등에 26만장 공급을 발표하면서 상황이 뒤집혔다.
세계적 품귀의 AI 칩을 대량 선(先)확보함에 따라 한국의 ‘AI 3대 강국’ 도약과 피지컬 AI 추진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동시에 양향자 최고위원의 “찢어야 할 빈 깡통” 발언과 김문수 전 장관의 “거짓말 공약” 비판도 회자되고 있다. 박주민 민주당 의원은 “6개월 전 ‘거짓말’이라던 분들이 지금은 침묵”이라고 꼬집었다. 일각에선 외교·산업 협력을 통한 대규모 조달 사례가 정치권 공방의 소재가 된 점을 지적한다. 반면 공급 물량의 실제 배분·납기·전력·데이터센터 인프라 등 후속 과제가 남았다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정계에선 공약의 현실성 논쟁이 재점화되는 가운데, 정부·민간의 집행력과 거버넌스가 성패를 가를 전망이다. 과거 미국 정부는 나치 독일보다 앞서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기위 개발에 착수했으나 전반적으로 회의적었다.

핵무기 개발에 회의적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
1942년, 미국이 핵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본격화했을 때 많은 과학자와 군 관계자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핵분열 연쇄반응을 무기로 만드는 것은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실제로 구현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하고 비용이 천문학적"이라는 것이 당시 지배적인 의견이었다. 심지어 일부 물리학자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프로젝트의 초기 예산은 고작 6000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당시 전투기 한 대 값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으로, 프로젝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초기 신뢰도가 얼마나 낮았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유럽에서 나치 독일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했다는 정보가 입수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망명 과학자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긴급 서한을 보냈고, 미국은 "독일보다 먼저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절박한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된 인물은 육군 공병대의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이었다. 그는 과학자가 아닌 군인이었지만, 펜타곤 건설을 성공적으로 완료한 경험으로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 관리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로브스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 위해 미국 전역에 걸친 초대형 생산망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난제는 핵무기의 핵심 물질인 우라늄-235와 플루토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천연 우라늄에서 우라늄-235는 0.7%에 불과했고, 이를 농축하는 과정은 극도로 복잡했다. 플루토늄은 자연계에 존재하지 않아 원자로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 두 가지 방식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결정되면서 프로젝트의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졌다. 테네시주 오크리지에는 우라늄 농축 시설이, 워싱턴주 헨포드에는 플루토늄 생산 원자로가,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에는 핵무기 설계 연구소가 건설되었다. 이 시설들은 엄청난 전력을 소비했고, 특히 오크리지 공장은 테네시강유역개발공사(TVA)가 제공하는 수력발전의 상당 부분을 사용했다. 한 도시의 전력을 혼자 소비하는 수준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시설이 극비리에 건설되었다는 점이다. 오크리지는 지도에도 없는 "비밀 도시"였고, 그곳에서 일하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조차 자신이 무엇을 만드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보안은 철저했고, 정보는 철저히 분산되었다. 우라늄을 다루는 사람은 플루토늄 작업을 몰랐고, 부품을 만드는 사람은 최종 제품을 알 수 없었다. 1945년까지 프로젝트 예산은 20억 달러 이상(현재 가치로 약 230억 달러)으로 폭증했고, 13만 명이 고용되었다. 듀퐁, 코닥 같은 미국 대기업들이 참여했고, 캐나다와 영국까지 협력했다. "불가능하다"던 프로젝트는 미국의 산업력, 기술력, 조직력을 총동원한 인류 역사상 전례 없는 거대 프로젝트로 변모했다.

맨해튼 프로젝트 성공이 미국에 가져다 준 것은
1945년 7월 16일 새벽, 뉴멕시코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가 성공했다. 폭발 순간 태양보다 밝은 섬광이 하늘을 가득 채웠고, 지평선 너머에서도 목격될 정도였다. "불가능하다"던 핵무기가 현실이 된 순간이었다. 프로젝트를 지켜본 과학자 오펜하이머는 힌두교 경전의 구절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한 달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일본은 항복했다.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던 본토 상륙작전 없이 전쟁이 끝났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킨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미국에 가져다 준 것은 단순히 전쟁 승리만이 아니었다. 이는 미국을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기반이 되었다. 핵무기 독점은 전후 국제질서에서 미국에게 압도적 협상력을 제공했다. 소련이 1949년 핵실험에 성공하기까지 미국은 유일한 핵보유국이었고, 이는 냉전 초기 미국 외교의 최대 자산이었다. 프로젝트가 증명한 것은 핵기술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의 산업 역량, 조직 능력, 민관 협력 시스템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입증했다. 불가능해 보이던 과제를 3년 만에 완수한 것은 미국식 대규모 프로젝트 관리의 성공 모델이 되었다. 이후 우주개발, 컴퓨터 개발, 인터넷 구축 등 미국의 모든 대형 국가 프로젝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경험을 토대로 했다. 또한 프로젝트는 과학기술에 대한 미국 정부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전쟁 전까지 미국의 과학 투자는 유럽에 비해 뒤처져 있었다.
하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의 성공 이후 미국은 과학기술을 국가 안보와 경제 발전의 핵심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 항공우주국(NASA), 국립과학재단(NSF) 등이 설립되었고, 미국은 20세기 후반 과학기술 혁신의 중심지가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프로젝트는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았다. 핵에너지 산업이 탄생했고, 방사선 의학, 동위원소 활용 등 민간 기술로 전환되었다. 오크리지 국립연구소,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 등은 전후에도 계속 운영되며 미국 과학기술의 중추가 되었다.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심리적 영향이었다. 미국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나라"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 자신감은 1960년대 달 착륙, 인터넷 개발, 실리콘밸리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미국이 20세기를 지배하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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