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계엄 사태에 소극적으로 항명한 군인들
12월 10일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12·3 비상계엄에 관여한 군 인사들에 대한 질책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가운데 계엄군의 국회 진입을 현장 지휘했던 이상현 제1특전공수여단장은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 여단장은 당시 "(상부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국회의원들을 끄집어내라. 안 되면 전기라도 끊으라고 했다"라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계엄군에게 총을 돌려매고 물러나라고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계엄 사태에 개입한 군인들은 명령에 죽고 살아야 하는 집단이지만 상부의 지시가 부당하다고 여겨 소극적으로 항명하며 지시하는 사항을 따랐습니다. 과거 상부의 지시에 항명하며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찾아봅시다.
수나라에 항명하고 고구려로 투항한 강이식 장군
강이식(姜以式) 장군은 수나라 수문제 밑에서 큰 전공을 세우며 수나라 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고구려로 귀화하여 큰 전공을 세우며 진주 강씨 시조가 된 인물입니다. 현명한 군주 수문제가 죽고 수양제가 뒤를 잇자, 고구려를 침공하려는 무리한 계획을 세웁니다. 강이식 장군은 수나라의 병마원수로서 참전하였으나, 고구려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고 여겼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고구려로 귀순하게 됩니다. 수나라 최고 장군이 고구려에 귀순하였으니, 수양제는 더욱 화가 났습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하자 이에 맞서 강이식은 병마원수(兵馬元帥)가 되어 5만의 정병을 이끌고 출전합니다. 그는 수나라의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추이(韋沖)에게 거짓으로 패합니다. 이에 수양제가 양양(楊諒)에게 30만 대군을 줘서 임유관에서 출정하게 하고 주나후(周羅喉)에게 수군을 맡겼습니다. 주나후는 수군을 이끌고 평양으로 나가겠다고 소문을 퍼뜨렸으나 강이식은 속임수를 간파하고 요하로 향하는 수군을 요격하여 격파하였습니다. 이후 강이식 장군은 성에 들어가 지구전을 펼치며, 수나라 군대는 양식이 떨어지고 장마로 인해 퇴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강이식 장군은 퇴군하는 수나라 군사들을 쫓아가 섬멸하였습니다. 고구려 수나라 전쟁에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만큼 큰 공을 세웠던 인물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에 항명하여 백의종군한 이순신 장군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통제사이며 전 세계 해군 역사상 유례가 없는 큰 전공을 세운 구국의 영웅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조선을 침략한 왜군에 맞서 싸우며, 초반 조선이 전세에 불리한 상황을 반전하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수군은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지켜내면서 왜군은 군량 조달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군과 수군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조선 정부는 이순신 장군에게 왜군을 공격하려 명령합니다. 그러나 신중한 이순신 장군은 명령에 항명하며 전투에 임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항명죄로 이순신 장군은 모진 고문을 당하며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됩니다. 백의종군은 장군이 흰옷을 입고 일반 백성처럼 일하도록 한 벌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치욕을 견뎌내는 동안 조선 수군 통제권은 원균 장군에게 넘어갑니다. 원균 장군은 조정의 출정 명령의 압박에 못 이겨 왜군과 싸웠고, 칠천량에서 12척의 배를 제외하고 조선 수군이 점멸합니다. 조선은 다시 바다의 제해권을 빼앗기며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다시 불러들여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합니다. 이순신 장군은 백성을 위해 치욕을 이겨내며 12척의 배로 200척이 넘는 왜군을 명량에서 격파하며 상황을 다시 역전시킵니다. 항명하였던 이순신 장군은 치욕을 견뎌내며 역사에 나를 구한 장군으로 백성을 위한 장군으로 뛰어난 지략으로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격파한 장군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군제 개편 명령에 항명한 송나라 영웅 악비
악비(岳飛)는 중국 남송 초기 뛰어난 장수입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뛰어난 무용을 갖춰 장군의 자리에 오릅니다. 북송은 금나라가 수도를 점령하자 남하하여 남송을 세웁니다. 악비는 송나라 장군으로 금나라에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의 노력으로 금나라에 빼앗긴 땅을 일부 되찾아오는 전공을 세웁니다. 강력한 유목 민족 금나라 군대도 악비 군대가 오면 긴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남송 정부에서는 금나라와 싸우기보다 화해하고 조공을 바치는 주화파가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주전파의 중심에 있던 악비 장군은 조정의 군제 개편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고, 무고한 누명을 쓰고 투옥된 뒤 살해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금나라는 악비 장군이 사라지자, 남송을 더욱 압박하였고, 북방의 영토를 포기하고 금을 섬기며 조공을 바친다는 내용의 화의(和議)를 체결하였습니다. 악비 장군은 정부의 의견에 항명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나 역사에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희생한 위대한 장군으로 기록되어 존경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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