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엄을 선언한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은 12월 3일 밤 10시 20분쯤 1차 담화에서 비상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비상계엄은 엄중히 경계한다는 뜻으로 전시나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가 발생하여 사회 질서가 극도로 교란되어 행정 및 사법 기능의 수행이 곤란할 때 대통령이 선포하는 계엄입니다. 윤 대통령은 "국가의 본질적 기능을 마비시키고 자유민주주의 헌정질서를 붕괴시키려는 반국가 세력에 맞서, 결연한 구국의 의지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라고 했지만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가 있어, 계엄 사무에 투입된 군을 철수시켰다"라고 밝혔습니다. 6시간 만에 계엄령은 해제되었지만 서울 시민들은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과거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사례를 알아봅시다.
4·19 혁명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예고 없는 북한의 남침 6.25 전쟁을 막아내며 큰 업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는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독립의 주역이었으나 정권을 유지하려는 욕심에 의해 부통령 후보였던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불법적인 선거가 이뤄지게 됩니다. 이는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으며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습니다. 시위 도중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자 반정부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4·19 혁명으로 인한 대규모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시위 확산을 막지 못하고 결국 하야하게 되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과가 많은 대통령으로 역사적 심판을 받았고 마침표를 잘못 찍으며 국부라는 칭호와 함께 독재자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니게 되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계엄령을 선포한 전두환 대통령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된 후 대한민국은 권력 공백 상태가 발생했습니다. 12·12 군사반란(1979년 12월 12일)으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며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에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대학이 폐쇄되며, 민주화 운동가와 지식인들이 체포되었습니다. 전국 계엄 확대에 반발이 가장 컸던 지역은 광주였습니다. 광주는 민주화운동에 신군부는 무력으로 진압하였고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 운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핵심 주동자였던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군사 반란 및 학살 책임자로 법적 처벌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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