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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이슈 식견

동덕여대 시위와 수준이 달랐던 과거 시위 사례는?

by JadeWolveS 2024.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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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공학 전환 도입에 반발한 동덕여대생들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면서 지방 대학들은 체질 개선에 나서고 있습니다. 서울에 있는 동덕여대도 이에 발맞춰 여대에서 공대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덕여대생들은 학교 정책에 크게 반발하고, 동덕여대 일부 학생들은 학교 건물에 래커칠하고 본관을 점거하는 등 시위에 나섰습니다. 학교는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펼쳐 큰 반발을 샀으며, 학생들은 학교를 엉망으로 만들어 동덕여대의 이미지를 실추시켰습니다.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이 잘못되었다면 비폭력적인 시위도 있었을 겁니다. 어떤 게 맞다고 할 순 없지만 문제가 조속히 해결되어도 학교에 칠해진 청소비용만 100억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비용도 고스란히 학교 측 부담으로 돌아가 학생들 등록금으로 부담이 될 것입니다. 동덕여대 사태처럼 과거 정책에 반대하여 시위를 벌였던 사례를 찾아봅시다.

래커칠로 엉망이 된 동덕여대 교내

국가 정책에 반대할 때 금식하던 성균관 유생들

성균관(成均館)은 조선의 최고 교육기관으로, 과거시험을 통과한 학생들만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개 정원은 200명으로 학생은 기숙사 '재(齋)'에 반드시 머물며 학령(學令)의 교칙을 지켜야 했습니다. 공부하던 성균관 유생들은 국가의 정책이나 시급한 일에 대해서는 집단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임금이 있는 편전 앞에서 "아이고"를 외치며 반대 의사를 표했습니다. 그래도 정부가 들어주지 않으면 수업을 거부하거나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국가의 인재들이 식사를 거르고 굶주리니 임금님도 꽤 골치가 아팠을 겁니다. 이래도 거부하면 모든 유생은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동맹 휴학을 했던 것입니다. 유생들이 각 지역으로 돌아가면 임금의 지도력에 큰 타격을 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민심도 지역 유생들 편이었기에 조선의 왕들은 유생들에 반하는 정책을 펼치기 어려웠습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자신의 의사를 비폭력적으로 전달하며 왕과 정부를 설득해 내곤 했습니다.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 효명세자의 성균관 입학도 출처:고려대 중앙도서관

평화적으로 시위했던 베이징 학생들

천안문 사건으로 불리기도 하는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은 1989년 4월 15일부터 6월 4일까지 중국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벌인 대규모 시위입니다. 공산주의를 근간에 둔 중국 정부에는 뼈 아픈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운동은 중국 공산당의 부정부패, 정치적 억압, 경제 불평등에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습니다. 베이징 학생들을 중심으로 개혁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했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국가를 위협하는 운동으로 규정하고 무참히 진압했습니다. 수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죽었지만, 사상자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중국 정부는 언론을 통제하며 이 운동을 금기시하였습니다. 많은 중국인은 톈안먼 사건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싸움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큰 대로에서 당시 진압하러 온 탱크 부대 앞을 한 젊은 남성이 홀로 막아선 사진은 톈안먼 사건의 상징적인 사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텐안먼 사건을 진압하로 온 탱크 부대를 혼자 막어섰던 남자 탱크맨이라 서방에 알려졌습니다. 출처: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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