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없는 계엄령, 속속 드러나는 위헌적 요소들
2024년 12월 3일 저녁 윤석열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계엄군은 국회에 도착하고 경찰은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통제하였습니다. 계엄법에 대통령은 국회를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과 측근들은 이를 무시하였고, 국회가 계엄 해제를 선언한 뒤, 계엄 상황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당시 박안수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은 군대가 어디에 침투되었는지 모르는 상황까지 알려지며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선관위에 나타났으며, 유튜버들 사무실에도 나타났습니다. 또한 국회의원을 체포하라는 명령까지 하달되었습니다. 그러나 계엄사령관은 이 내용을 정확하게 인지 못 한 상태였습니다. 다음 날 대통령실에서는 야당의 폭주를 알리고자 계엄을 선포했다고 알려왔습니다. 한나라의 대통령이 권한이 있다고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시국이라 하더라도 이런 방법을 쓴 것에 국민이 격분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민이 부여한 권한입니다. 민심도 잃은 대통령이 수세에 몰리자, 명분 없는 계엄령을 선포하여 코너에 몰리며 탄핵 또는 하야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과거 명분 없는 군대 동원으로 위기를 맞이한 군주들을 찾아보겠습니다.
명분 없이 고구려를 침공한 수나라 수양제의 최후
수양제는 중국 수(隋)나라의 제2대 황제(재위 604∼618)입니다. 그는 수문제의 둘째 아들로 치밀한 전략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릅니다. 황제가 된 그는 백성의 고혈을 짜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수축하고 대운하를 완성하였습니다. 중국의 혼란기를 끝내고 마침내 전국을 통일한 수나라는 수양제에 이르러 동북아시아 최강 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수양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업적을 쌓고자 고구려를 침입하였습니다. 아무리 정복 전쟁이라 하여도 명분 없는 싸움은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수나라는 고구려 침공 명분이 약했고, 군사 강국으로 오랜 역사를 지닌 고구려를 3차례나 침공하였지만 대패하며 수많은 군사를 잃습니다. 수나라는 군사력이 급격히 약해졌고, 이틈을 타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습니다. 수양제는 결국 명분을 잃은 전쟁에 패하며 황권이 약해지는 상황을 초래했으며, 군 수뇌부의 신망도 잃음으로 자기 친위대 신하인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었습니다.
조선 침략의 명분이 약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3대 영웅 중 한 명으로 전국시대를 통일한 인물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사무라이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그 당시 전쟁이 사라지자, 불만이 고조되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사무라이를 달래며 대국 명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조선 정벌을 내세웁니다. 그 당시 측근들은 명분 없는 싸움과 조선을 상대로 이길 수 없다며 전쟁을 말렸습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조선 정벌을 밀어붙여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합니다. 조선은 예고 없는 전쟁으로 처음에 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의 도움과 구국의 영웅 이순신의 활약, 백성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우자, 일본군은 수세에 몰립니다. 전쟁이 길어지며 조선 정벌에 나섰던 일본 장수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 점차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에서 빠르게 철수합니다. 히데요시는 조선과의 전쟁으로 최측근의 군사력이 매우 취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라이벌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 家康)는 이 틈을 노려 히데요시의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며 막부의 시대를 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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