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도 경쟁자로 만든 권력
권력 앞에서는 부모·자식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천륜을 저버리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 무능한 왕들 밑에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아들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식이 뛰어난 것을 좋아하기보다 오히려 적대시하였다. 그 이유는 아들과 자신이 비교되었기 때문이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나라를 혼란에 빠트렸던 조선의 임금들을 살펴보자.
광해군의 능력을 시기한 선조
선조는 조선 14대 임금으로 방계(傍系) 출신이다. 직계(直系)가 아니었기 때문에 전통성을 인정받지 못해 왕위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늘 불안해했다. 그래서 선조는 열등감이 대단한 왕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선조 시대에 조선은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다. 왜군이 빠르게 한양으로 진격하자 선조는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성을 버리고 급히 평양으로 떠났다. 왜군의 추격이 두려워진 선조는 명나라로 귀순할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선조는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하자 그의 아들 중에 능력이 뛰어난 광해를 세자로 책봉하며 조선의 임시정부를 이끌도록 명했다. 광해는 세자로서 제 몫을 톡톡히 해냈으며 위기에 처했던 조선을 구하는데 탁월한 정치역량을 보여줬다. 왜란이 끝나자 세자의 업적에 대한 백성들과 신하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선조는 아들인 광해와 비교되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며 세자책봉을 영창대군으로 바꾸려는 시도까지 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이 어리고 광해를 세자에서 폐하기에는 명분이 없어 수포가 되었다. 선조는 아들 덕분에 왜란을 수습했지만, 열등감에 사로잡혀 중차대한 나라의 보위를 바꾸려 하였다.
석연치 않은 소현세자의 죽음
소현세자는 조선 16대 임금 인조의 아들이며 선조의 손자이다. 인조도 방계 출신으로 백부인 광해군을 몰아내며 정권을 장악했다. 조선은 청나라와 명나라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흐름을 읽지 못하였고 명분을 좇아 친명반청 정책을 펴게 된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전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을 먼저 공략하게 된다. 왜란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조선은 청나라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인조는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치욕을 겪었다. 이때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8년 뒤 조선에 돌아왔다. 인조는 귀국한 뒤 청나라에 우호적인 소현세자에게 반감을 품기 시작한다.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되갚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아들은 청이 곧 명을 무너뜨릴 것이라 청과 우호적으로 지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청나라에 대한 부자지간의 의견이 대립하기 시작하자 인조는 자기가 당한 수모를 되갚아주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조선에 귀국한 지 두 달도 안 된 소현세자는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아들의 죽음에 아버지 인조가 개입했다는 설이 후대에 전해지는 이유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정치적으로 불편한 관계 때문이었다. 조선의 계몽 군주가 될 수도 있었던 소현세자는 역사 속에 빛을 보기도 전에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왕권을 가지기 위해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치열한 대립이 이뤄졌다.
조선 14대 임금 선조는 아들 광해의 능력을 시기하여
세자를 교체하려 하였다.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정책적으로 대립하던 소현세자는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한다.
자식에게 열등감을 느꼈던 두 임금은
역사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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