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천대받았던 여자 노비
조선시대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 4개의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중에도 천민은 그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자 노비는 노동력의 가치가 있어 상대적으로 여자 노비가 더욱 천한 취급을 받았다. 당시 시대상으로 노비들은 말 한 마리 값보다 못할 정도였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여자 노비 중에서 조선을 흔들었던 두 명의 여인이 있었다. 엄격한 신분사회를 중요시했고 남성 중심의 사회를 강화했던 조선이 그것도 여자 노비들에 의해 까무러칠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 두 명의 여자 노비는 누구였는지 알아보자.
조선의 왕을 낳은 무수리
숙종(肅宗)은 자신이 폐한 인현왕후(仁顯王后)를 가까이서 모신 무수리 최씨가 민 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축원을 드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를 인연으로 하룻밤을 보내게 되어 첫아들 영수를 낳았으나 곧 죽고, 둘째 아들 연잉군 금(昑)을 낳았는데 이가 곧 영조(英祖)가 된다. 그리하여 무수리 최 씨는 숙원에서 곧이어 내명부 1품 숙빈으로 책봉되었다. 궁궐에서 잔심부름하거나 청소하던 무수리에서 조선의 위대한 임금 영조를 낳는 최초이자 마지막인 노비 왕모가 되었다. 숙빈 최씨에 대한 기록이 많지는 않으나 그녀의 착한 마음과 심성은 훗날 영조가 올바른 정치를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영조는 어머니의 무덤을 능으로 승격시키려 하였으나 어머니의 신분으로 인해 그 일은 좌절되었다.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아들을 낳아 조선을 키워낸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여노비 중에 손에 꼽히는 인물로 기록되었다.
조선의 왕을 망가뜨린 창기
연산군(燕山君)은 생모 윤 씨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게 되며 어머니의 죽음에 관련된 신하들을 무참히 도륙하며 패륜에 가까운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장녹수(張綠水)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몸을 팔며 살았고 혼인도 여러 번 하였다. 그러다가 제안대군(齊安大君)이 부리는 가노(家奴)의 아내가 되어서 아들 하나를 낳고 노래와 춤을 배워서 창기(娼妓)가 되었다. 장녹수는 나이가 30세가 되어도 겉으로 동안으로 보였고 노래도 잘 불러 연산군에 의해 발탁되었다. 장녹수는 연산군의 비위를 잘 맞추어 종3품 숙용(淑容)으로 품계가 올랐다. 그녀는 연산군의 비호 아래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훗날 중종반정을 통해 연산군은 폐위되었고 국가의 자산을 탕진한 장녹수는 참수되었다. 그녀의 시체에 돌을 던져 돌무더기가 산을 이루었다고 하니 무덤하나 없이 역사에 이름만 남긴 여자 노비였다.
조선 시대 신분을 극복한 두 명의 여자 노비가 있었다.
숙종 때 무수리 최 씨는 모시던 폐비 민 씨의 만수무강을 비는 착한 마음으로
임금의 마음을 얻어 영조라는 왕을 낳았다.
반면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몸을 팔며 출세하길 원했던 장녹수는
연산군의 눈에 들어 호가호위하다 최후에는 참수되었다.
둘 다 노비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높은 자리에 올랐지만
후대의 평가는 상반된다.
올바른 마음을 가져야 끝이 좋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노비에 관한 글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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