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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투자 식견

퇴계 이황의 투자 전략

by JadeWolveS 2023.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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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의 달인' 퇴계 이황

조선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어릴 적 가난하였다. 퇴계는 학문에 힘쓰느라 자주 굶주려야 했고 그런 그에게는 가난이라면 지긋지긋했던 모양이다. 후대에 대학자로 알려졌지만, 재테크의 달인이었던 점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학문에 힘쓰면서도 퇴계는 재산을 불리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된다면 한낱 이방에 불과하다고 말한 그였지만 든든한 자산을 기반으로 후학을 길러낸 덕분에 역사에 위대한 학자로 남을 수 있었다. 가난했던 이황이 어떻게 큰 자산을 모을 수 있었을까.

[퇴계 이황 출처:네이버]

농업을 통해 이익을 키워

퇴계는 먹고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농업 관련 서적을 살피며 당시에 돈이 되는 작물을 키우기로 하였다. 당시엔 목화가 대표적으로 돈이 되는 작물이었다. 그는 목화를 심어서 이익을 남기기 시작했다. 또 당시에 농사를 짓는데 이앙법(移秧法)을 과감하게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앙법은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방법이라 가뭄이 들면 자칫 한 해 농사를 망칠 수도 있어 나라에서 금지했던 농사법이었다. 이 때문에 퇴계는 보(堡)를 만들어 논에 물을 계속 댈 수 있도록 하여 이앙법의 단점을 보완하고 생산량을 더욱 늘릴 수 있었다. 불법이던 이앙법을 활용한 점을 볼 때 퇴계는 투자적인 면에서 매우 과감했음을 알 수 있다.

꼼꼼한 자산관리자 이황

퇴계는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노비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노비 중에 누가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를 꼼꼼하게 적어서 아들에게 전한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또 영수증을 챙기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말에게 먹일 콩을 살 때도 직접 영수증을 받아 챙겼다고 하니 퇴계는 자산관리의 측면에서도 빈틈없는 투자자였다.

 

두 번의 결혼 '처 테크'도 성공

퇴계는 결혼하기 전에 대략 논밭 50두락(斗落, 마지기)을 소유했으며 노비는 13명 정도였다. 그가 결혼할 때 아내가 혼수로 가져온 재산이 제법 많았다. 하지만 부인이 세상을 빨리 떠 둘째 부인을 맞아야 했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혼수로 가져온 논밭이 1,500두락 정도 되었다. 퇴계가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줬을 때 논밭 2,000~3,000두락에 노비가 300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잘 사는 양반들도 노비는 200명 정도였다고 하니 이황은 자산을 배로 불린 셈이었다.

근검절약하면서도 도산서원 세워

퇴계는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사치하는 것을 멀리하며 공부에 힘썼다. 자산을 늘려도 비싼 옷이나 집안을 꾸미는 데 힘쓰지 않았다. 오히려 후학을 키우는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세웠다. 도산서원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요즘 대학교에 큰돈을 기부하는 기업인들을 보곤 한다. 그들은 나라의 국력을 위해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일평생 모은 재산을 교육에 기부하는 것이다. 퇴계도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도 힘써 모은 재산은 후학을 키우는데 쾌척한 통 큰 기부자였다.

조선의 대학자 퇴계 이황은 가난한 시절을 곱씹으며 자산관리에도 힘썼다.
그는 열심히 모은 재산을 쾌척, 후학을 양성하는 도산서원을 세운 통 큰 기부자였다.

후학 양성을 위한 재력가들의 기부행렬이 이어진다면
사회는 건강하고 나라의 미래는 창창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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