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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이슈 식견

영화 '파묘', 조선 왕실에서도 벌어지다

by JadeWolveS 2024.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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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를 소재로 흥행 중인 영화

'파묘(破墓)'는 죽은 자의 묏자리를 옮기는 것으로 고려시대부터 풍수지리 사상의 영향으로 현재까지도 집안에서 매우 신중한 일로 여긴다. MZ세대는 화장이 대세로 자리 잡으며 죽은 자를 땅에 묻는 장례문화도 쉽게 볼 수 없게 되었고, 묘를 이장하는 파묘도 생소한 단어가 되었다. 파묘를 통해 초자연적 현상을 풀어나가는 스토리가 대중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극장가에서 흥행을 이어가고 있다. 조선시대 최고 권력가였던 왕 중에도 파묘를 한 임금이 있었다. 파묘의 사연이 있는 임금을 살펴보자.

조선 4대 왕 세종 묘

왕실에 불어닥친 변고로 파묘된 세종

조선의 8대 왕 예종(睿宗)은 왕위에 오르기 전 발생한 계유정난(癸酉靖難)과 그 후 계속된 왕실 내에서 흉흉한 일들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들이 발생한 원인으로, 신하들은 세종(世宗)의 묏자리를 지목했다. 세종이 생전에 정한 가묘 위치는 선대왕 태종(太宗)이 묻힌 헌릉 서쪽 지역이었으나, 그곳을 파보니 물이 나왔다. 세종은 지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의 묘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을 찾기 어렵다고 고집했다. 세종 사후, 왕실에서는 여러 불행한 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5대 왕 문종(文宗)의 사망에 이어, 6대 왕 단종(端宗)은 숙부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세조는 재위 기간 피부병에 시달렸으며, 그의 장남은 수면 중 돌연사했다. 세조(世祖)의 차남인 예종은 즉위 1년 만에 사망했고, 예종의 아들도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세종 사후 19년 동안 왕이 네 번이나 바뀌고, 세자와 원자가 연이어 사망하는 등 왕실에서 흉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조정은 세종의 능을 적절한 곳으로 이장하기 위해 전국에서 뛰어난 지관을 모집했다. 지관들은 도성 100리 이내에 명당을 찾지 못했고, 100리 밖의 여주에 있는 명당을 찾아 세종을 영릉에 안장했다. 세종은 현재 여주에 있는 영릉에 안장되어 있으며, 이는 예종이 서초구 내곡동의 국정원 자리에서 세종의 묘를 이장한 결과였다. 이후 조선 왕실은 9대 왕 성종(成宗)에 이르러 안정을 되찾았다.

 

파묘한 자리에 영조를 묻은 정조

정조(正祖)는 조선 22대 왕으로 영조(英祖)와 더불어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펼친 위대한 왕으로 불린다. 정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로 어린 시절 할아버지 영조의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도 영조와 정조 사이에 스토리는 영화 소재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영조는 생전에 홍릉에 묻히길 원했다. 영조 사후 정조가 왕이 되자 할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동구릉 내의 원릉에 묻었다. 원래 이 자리는 효종(孝宗)이 잠시 묻혀다가 파묘된 자리였다. 효종이 묏자리를 옮겼던 이유는 110년 전 동인과 서인의 권력 다툼에서 발생했다. 통상 파묘된 자리는 흉지라 하여 죽은 자를 다시 묻기를 꺼렸다. 정조는 지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릉에 영조를 묻었다. 누군가는 정조가 할아버지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하고, 다른 이는 정조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靜順王后)를 배려한 효심이었다고 한다.

 

한국의 풍수지리 사상을 통해 재밌는 소재로 흥행하고 있는 파묘.
조선시대 최고 권력자도 불길한 흉사로
풍수지리 사상에 의해 자신의 묏자리가 옮겨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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