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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이슈 식견

광복절을 맞이한 행사가 왜 둘로 쪼개졌을까?

by JadeWolveS 2024.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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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독립기념관장 임명이 쪼개버린 광복절 행사

광복절은 한국이 일본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독립 이래 광복절 행사가 둘로 쪼개진 일은 이번이 첫 사례입니다. 발단은 이종찬 광복회 회장이 김형석 신임 독립 기념관장 임명에 반대하면서부터입니다. 김형석 기념관장이 뉴라이트 사관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뉴라이트는 신보수주의를 의미합니다. 뉴라이트 사관은 새로운 역사적 해석을 내놓기도 해 역사학계에서는 논란이 되곤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한국의 건국절을 1945년이 아닌 1948년 남한 정부가 수립된 시기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남한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 큰 공이 있는 이승만 대통령이 국부 즉 건국의 아버지라 평가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많은 사학자가 고증을 거쳐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 독립을 위해 큰 공을 세웠으며, 북한이 침략한 6.25 전쟁을 막아낸 큰 업적도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독재를 위해 저지른 여러 사건도 평가하여 결국 공보다는 과가 많은 인물로 기록하여 현재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 이승만 대통령 등 나라를 위해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은 좌, 우 이념 전쟁으로 후손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국가를 되찾은 날인 광복절에 이념 갈등으로 번지며 둘로 쪼개진 광복절 행사 사례를 보며 과거 서로 간의 의견 차이로 큰 갈등을 빚었던 한국 역사를 알아봅시다.

정당 간 의견 수용을 사라지게 만든 기해예송 논쟁

기해예송(己亥禮訟)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쟁입니다. 조선 시대 효종이 사망하자 아버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의 상(喪)에 어떤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싸우기 시작합니다. 조선시대 국가 지배 이념이었던 성리학에 바탕을 둔 예학(禮學)은 적장자가 사망했을 때 부모는 3년복을 입고 차자가 사망했을 때는 1년복을 입도록 했습니다. 인조는 첫째 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의문사로 죽자, 그의 아들 석면 즉, 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통을 계승하게 했습니다. 따라서 효종은 자의대비의 차자라 1년복을 입는 게 맞았습니다. 송시열(宋時烈)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1년복으로 결정하였으나, 윤휴(尹鑴), 윤선도(尹善道)는 왕가의 특수성을 들어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이 논쟁은 서인과 남인의 각 정파의 정치생명이 달린 문제로 치닫게 되고 결국 서인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기해예송을 시작으로 각 정당은 양당의 의견을 듣거나 수용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폐단은 조선 사회에 큰 문제가 되었고, 영조와 정조 때에는 각 당의 인사를 골고루 쓰겠다는 탕평책(蕩平策)까지 써야 했습니다.

 

유교 사상과 신분제 때문에 서울 진공에 실패한 13도 창의군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은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자 전국의 의병을 모아 서울로 진격하여 통감부를 격파하고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7년 12월 경기도 양주에서 조직된 전국 의병부대 조직입니다. 이인영(李麟榮)을 총대장으로 각도의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 11월에 경기도 양주에 집결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호응하여 모인 각도의 의병부대는 1만 명이 넘었고, 이 가운데 해산된 군인도 3,000명이 포함되었습니다. 이인영은 각 지역에 의병장을 세웠는데 모두 양반 유생 출신으로 평민 출신 신돌석(申乭石) 장군, 홍범도(洪範圖) 장군은 참여시키지 않았습니다. 13도 창의군은 동대문으로 진격하여 일본군과 맹렬히 싸웠으나 후속부대 지원이 없어 퇴각했습니다. 이때 이인영은 자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휘권을 허위(許蔿)에게 넘겨주고 귀향했습니다. 총대장을 잃은 13도 창의군은 서울 진공에 실패하며, 다시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13도 창의군은 지휘부인 양반 유생 의병장들이 유교적 이념과 신분제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평민 의병장과 평민 부대의 폭넓은 지지를 끌어내지 못하며 안타까운 수많은 목숨만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인영은 일본군에게 잡혀 아버지 삼년상도 다 치르지 못하고, 옥중에 고초를 겪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의견 차이로 인한 집단의 갈등은 과거부터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이러한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느냐에 따라 바뀌지 않을까?

 

정당 갈등에 관한 글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양당의 대립이 심하면 어떤 결말이 나올까?

총선이 다가오면서 양당 체제 대립 심해져 2024년 1월 야당 대표가 피습당했다. 또 여당 대표는 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대표직을 그만두며 비상대책위원장이 맡으며 다가오는 총선을 준비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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