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객관적인가?
역사는 승자에 의해, 승자를 위해 쓰인 기록이 많다. 예를 들면 중국의 당나라 역사서에 따르면 고구려 연개소문은 자신이 모시는 왕을 죽인 간신배로 기술되어 있다. 고구려의 역사 기록이 미미한 상태에서 연개소문의 인물됨을 속속들이 알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현존하는 기록만 가지고 역사를 쓴다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사학자들의 고증 방식에 과학적 접근방식이 더해지면서 사료의 가치와 신뢰성이 높아지는 전환점이 되고 있다.
칭기즈칸의 학살, 지구온난화 늦췄다?
세계 최고의 정복왕이라 불리는 칭기즈칸은 많은 학살을 했다고 한다. 사서의 기록들만 본다면 최대 4,000만 명에 이른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몽골인들이 승리를 과장해서 적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2011년 1월 환경 전문 뉴스 웹사이트인 몽가베이(mongabay.com)에 의하면, 카네기연구소 지구 생태학 연구팀의 율리아 폰 그라츠(Julia Pongratz) 박사는 연구를 통해 칭기즈칸과 그의 군대가 벌였던 정복 행위로 인해 지구온난화가 최소 2세기 이상 늦춰졌고, 지구 기온도 떨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원정으로 4,0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금나라, 서하, 호레즘의 대도시들이 자연 상태로 되돌아가면서 목재와 석탄 사용이 급감한 덕분이라는 것이다.
해동성국 발해가 두 달 만에 멸망해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이 고토(古土) 회복을 주창하며 세웠던 발해. 고구려의 정신을 물려받아 만주를 기반으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렸지만, 거란족(契丹族)이 세운 요(遼)나라에 의해 20일 만에 멸망했다. 역사학자들은 발해 멸망 원인을 지배층 계급에서 밀려나 불만이 쌓인 말갈족(靺鞨族)이 요나라의 공격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단기간에 발해가 망했다는 설에 무게를 두고 있다. 당시 발해의 군사력이 과연 요나라에 20일 만에 멸망할 만큼 약했을까? 물론 사료(史料)가 부족하여 구체적으로 논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런데 백두산(白頭山) 폭발을 제기하며 발해가 혼란에 빠져 멸망했을 것이라는 과학적 가설도 있다. 특히 10세기 폭발한 백두산의 화산재를 일본 홋카이도에서 발견한 일본 학자들은 이 정도 폭발 규모라면 한 국가를 패닉 상태로 끌고 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로마의 폼페이가 화산재에 묻혀 잊히듯이 백두산 근처에 발해의 중심도시인 5경(京)이 모여있었기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손잡게 하는 연결고리이다.
역사 자료의 과학적 검증을 통해서
어둠 속에 묻힌 과거의 사실과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인문학과 과학의 만남은 필수적이다.
미래의 변화에 관심이 있다면 청랑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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