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발 묶은 철도파업 사태
철도노조는 SRT가 경전·동해·전라선을 확대하면서 정부가 수서-부산 간 열차를 축소해 승객들의 불편이 크다는 이유에서 해당 노선에 KTX 투입을 강력하게 요구하며 파업을 진행했다. 1차 파업이 끝나고 2차 무기한 파업을 예고하면서 추석이 다가오는 명절에 국민이 큰 불편을 겪을까 우려하고 있다. 사측과 정부는 노조가 이 부분에 관여할 일이 아니라 일축했지만, 노조는 강경하게 대응하고 있다. 노조는 노동조합을 줄여 부르는 말로 근로자의 근로조건 개선 및 유지와 근로자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목적을 두고 있으나 근래에 정치적 목적으로 파업하는 일로 구설에 오르고 있다. 노조의 정치적 파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항일투쟁정신 고무시킨 조선의 첫 노조 파업
원산 총파업은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文坪里)에 있던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회사의 일본관이 한국인 유조공을 구타하자, 조선 노동자 120명이 감독 파면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한 데서 시작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는 임금 차별을 받는 데 그치지 않고 무자비한 폭행과 모욕까지 감당해야 했다. 그리하여 조선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여 노동자의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한편 일본인 노동자와 똑같은 대우를 요구했다. 조선의 첫 노조 파업이었던 원산 총파업은 노동자의 근무 환경 개선도 있었으나 일본에 대한 강력한 저항 메시지로 전달되었다. 원산 총파업은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항일투쟁정신을 고무시키며 전국 각지에서 파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반 유신 정권의 계기가 된 YH무역사건
YH무역사건은 1979년 서울특별시에 있던 YH무역 노동자 200여 명이 회사 측의 부당한 폐업 공고에 반대해 신민당사에서 회사 운영의 정상화와 노동자들의 생존권 요구를 주장하며 벌인 농성 투쟁 사건을 말한다. 그 당시 한국은 외화를 벌기 위해 경공업에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다. 그중 YH무역도 가발 경기의 호황과 정부의 수출 지원책에 힘입어 1970년대 초 종업원이 최대 4,000여 명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빠른 성장과 함께 YH무역은 가발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이 당일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자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폭행을 당한 여공이 경찰을 불러도 정부의 친기업 정책에 반하는 점이 커 회사에서 해고당하거나 부당한 폭행을 견뎌야 했다. 석유파동으로 세계 경제가 나빠졌고 YH무역의 실적도 빠르게 악화하자 회사를 일방적으로 폐업하려고 하였다. 이에 맞서 여공들은 노조를 만들어 회사의 폐업을 막으려 하였다. 노조가 농성을 이어가자, 당시 유신정권은 경찰 1,000명을 투입하여 강제로 해산을 시킨다. 노조와 함께 농성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을 전국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YH무역사건은 전국에 반유신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노조가 사측의 정책 결정까지 입김을 넣는 것은
노동법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노조 결성의 시작은 노동자의 권리가 중요했지만
시대적으로 정치적 운명체와 같이 투쟁하게 되면서
점점 정치색을 띠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나라의 발전과 관련된 글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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