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자를 칭찬하는 문화 세종 시대부터 이어져
한국은 고려시대부터 유교 사상을 받아들이고 예의범절을 중시하여 조선시대에 이르러 동방예의지국이라 별칭을 얻었다. 유교 국가 조선의 기초를 마련한 세종은 진주 사람 감회가 아버지를 죽이는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효행 사상을 강조하였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에게 상을 내려 효도하는 것을 장려했다. 부모는 자식을 낳고 키워야 하는 의무가 있었고 자식은 부모가 늙으면 공양할 의무가 있었다. 효행 사상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함없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사고가 약해지자, 부모는 효도계약서를 통해 효도를 받고자 하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효도도 계약서를 통해 이행되어야 하는 살벌한 시대에 과거의 효도를 했던 자식들의 사례를 살펴보며 효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보자.
어머니를 봉양한 지극한 효자 강혁
강혁(江革)은 고대 중국 한나라 시대 사람이다. 시대가 혼란해지자 강혁은 어머니를 업고 숨어 다니며 봉양했다. 그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나물을 캐러 다니다 도적을 만났다. 죽을 위기에 처한 그는 홀로 남은 어머니를 걱정하며 슬피 울었다. 그 모습을 본 도적은 감동하여 그를 풀어주며 숨을 곳을 알려주었다. 강혁은 굶주리고 더부살이를 하며 살았으나 어머니에게는 항상 좋은 옷과 음식을 드리며 잘 봉양하였다. 그는 고향에 다시 돌아와 설에 마을 사람들이 모일 때 어머니를 수레에 태워 모시고 갔다. 어머니가 짐승이 끄는 수레를 타면 힘드실까 봐 그가 직접 끌었고, 이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은 "큰 효자 강혁"이라 불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는 무덤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시묘살이는 자식이 부모님 무덤 근처에 움집을 짓고 산소를 관리하며 공양하는 일이다. 강혁이 시묘가 끝나고도 상복을 벗지 않자,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상복을 벗게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황제는 그의 효심에 감동하여 쌀 천 석과 추석 때마다 술과 양고기를 내리며 안부를 물었다.
돈을 빌려 아버지 장례 치른 동영
중국에 전해지는 동영전설(董永傳說)의 동영(董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장례 치를 돈이 없어 남에게 돈을 꾸었다. 그는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돈을 갚을 길이 없어 종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동영은 돈을 빌린 사람에게 가는 길에 한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동영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하였다. 그녀의 말을 받아들여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고 돈을 꾼 사람에게 갔다. 그는 비단 삼백 필을 짜야만 놓아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동영의 아내는 한 달 내로 비단 삼백 필을 짜냈다. 마침내 두 사람은 풀려나 처음 만났던 곳으로 되돌아가자, 아내가 말했다.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칠선녀라며 그대의 효도가 지극하여 하늘이 나를 대신 보내어 빚을 갚으라 하였다"라고 말하며 하늘로 올라갔다.
어버이날에 부모가 자식에게 가장 받고 싶은 선물은 돈이라고 한다.
그러나 부모는 돈보다 자식이 효도하는 것을 더 바랄 것이다.
과거 부모에게 지극히 효도했던 자식은 훗날 더 큰 보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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