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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성장 방식

우리 조상의 공존 방식은 어땠을까?

by JadeWolveS 2023.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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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짓는 가을

살랑살랑 부는 가을바람과 황금빛 물결로 익어가는 벼를 보고 있으면 가을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이맘때 교외로 나가면 벼 수확을 준비한다고 바쁜 농부들의 모습도 빈번하게 보게 된다. 과거에는 수확제라 하여 추수가 끝나면 신에게 감사하며 마을마다 행사를 열었다. 지금은 수확이 끝나면 마을 회관에 주민들이 모여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는 행사로 변모했다. 조상들은 얻는 게 있으면 나누는 것을 중요시 했다. 나누는 것이 더 큰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던 조상들의 풍습을 알아보자.

 

고수레 출처:학국학중앙연구원

동물과 공존을 중시했던 '고수레'

'고수레'는 산이나 들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일부 음식을 던지는 한국 전통 풍습이다. 고수레의 시작은 그 사람의 주변에 화복을 주는 신을 존경하고 신이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고수레에 관한 기록은 고려시대에도 찾아볼 수 있다. 최영년(崔永年)이 지은 『해동 죽지(海東竹枝)』 상(上) 편 ‘고시래’를 보면 “야사에 이르기를, 단군 때 고시씨가 농사를 가르쳐준 은공을 잊지 않고, 지금까지 농부가 들에서 밥을 먹을 때 한 술 떼어 던지며 고시래라고 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高矢來 野史云 檀君時 有高矢氏 闢草萊拓里 以敎稼穡 至今 田民餉于田間 先以一匙飯 先號高矢來 而祭之).”라는 내용이 나온다. 지금은 함부로 음식을 던지는 게 환경오염을 일으킬 수 있어 법으로 규제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동물과 공존하며 신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좋은 풍습이었다.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24대 진흥왕 출처:위키디피아

'까치밥'은 언제 어떻게 유래되었나

가을이 되면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감을 몇 개 놔두고 수확한다. 시골에서 감이 익어 땅에 떨어지면 달콤한 감을 먹으러 나오는 동물들을 보곤 한다. 제사를 지내고 제사 음식을 대문 밖에 두는 것을 '까치밥'이라고 부른다. 까치밥이라 부르기 시작한 데는 일화가 있다. 신라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眞興王)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 활로 까치를 사냥하게 된다. 그는 종을 시켜 까치를 잡아 오라 하였으나 까치는 퍼드덕거리며 도망을 갔다. 종은 한참을 따라가다 큰 웅덩이를 발견하였는데 까치는 없고 편지 하나가 남아있었다. 종은 편지를 진흥왕에게 가져다주었다. 편지 겉면에 '편지 뜯어보면 둘이 죽고, 안 뜯어보면 하나가 죽는다'라고 적혀있었다. 진흥왕은 그길로 궁궐로 돌아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는 신하들과 고심한 끝에 자기 죽음을 예언한 편지라 생각하여 편지를 뜯어본다. 편지에는 '관을 향해 쏘라'라고 적혀 있었다. 진흥왕은 죽음을 대비해 미리 관을 짜놓았는데 활을 가져와 관을 향해 힘껏 쏘았다. 관에는 진흥왕을 암살하려는 역적 두 명이 숨어있었고 두 명은 화살에 맞고 죽었다. 이 일을 계기로 진흥왕은 까치를 국조로 여기고 날을 정해 까치밥을 주기 시작하였다. 까치를 사냥하려고 나갔다가 목숨을 구한 진흥왕의 일화는 동물들에게 베풀면 큰 복이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해주었다. 까치는 복을 가져다주는 동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말 못 하는 짐승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우리 조상도 동물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풍습으로 후손에게 전했다.
다양한 갈등이 생기는 요즘 조상이 베풀었던 방식을 곱씹어 보며
서로 공존하는 방법을 모색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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