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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인재 식견

실제와 다르게 기록된 여황제들

by JadeWolveS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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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패자의 가혹한 현실

정치판에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내로남불' 아닐까 생각이 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말의 줄임말이다. 선거에서 이긴 자들이 권력을 쥐고 패자는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현실은 시대가 변해도 변함이 없다. 역사서도 승자의 기록이라 왜곡된 인물들이 상당하다. 게다가 기존 권력의 중심에 여자가 있었다면 그들을 몰아낸 반대 세력은 없는 말도 만들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했을 것이다. 백성들을 위했지만, 정치적으로 희생되었던 여황제들을 살펴보자.

 

[ 무주의 여황제 측천무후 출처:국립고궁박물관]

외세 침략 막고 강력한 고려 만든 천추태후

천추태후(獻哀王后)는 고려를 세운 왕건(太祖)의 손녀이고 후대에는 음탕한 여자의 대표 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실상을 잘 살펴보면 천추태후는 한국사에 보기 드문 여장부였다. 천추태후는 자기 아들 목종(穆宗)이 왕위에 오르며 섭정을 하게 된다. 고려는 당시에 북쪽으로 발해를 멸망시키고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한 요나라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요나라는 송나라를 공략하기 위해 후방에 있는 고려를 제압할 필요가 있었다. 천추태후가 섭정하는 동안 고려에는 이념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추태후 아들 목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성종(成宗)은 불교 중심의 고려를 유학자들로 채워 나라 정책에 큰 변화가 있었다. 송나라를 대국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유학자들과 북벌과 고려의 자주성을 중시하며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서 실리 외교를 펼치는 천추태후와 큰 갈등이 있었다. 또 북진을 위해 서경(西京)을 중시하면서 신라계 귀족들과도 대립하고 있었다. 천추태후는 외가 쪽 사람 김치양(金致陽)을 궁으로 불러들여 세력을 키웠으나 자기 아들 목종이 후사가 없자 김치양과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조(康兆)의 난으로 실패하고 권력을 내려놓아야 했다. 후대에 평가는 혹독하게 천추태후를 깎아내렸지만, 고려는 천추태후가 섭정하는 동안 외세의 침략이 없었고 강력한 고려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훗날 요나라는 고려를 두 차례 공격하였으나 큰 피해를 보고 나라가 급속도로 쇠약해져 여진족에게 멸망하게 되었다.

 

당나라 전성기 이어간 측천무후

중국 최초의 여황제이며 아들까지 죽여가며 왕위에 오른 여황제 측천무후(則天武后). 중국 역사상 훌륭한 정치를 했다는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어받았던 고종(高宗)은 아내 측천무후에게 정치적으로 많이 의지하였다. 당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는 자식들을 대신해 섭정하였다. 하지만 끊임없는 반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여황제로 즉위하게 된다. 그녀는 황제가 되어 권력을 쓰는 데 있어서 가장 무자비하고 냉혈한 군주였다고 평가받지만, 당나라는 더욱 번성하고 있었다. 측천무후가 통치하는 시절 당나라는 실크로드를 통해서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고 백성들의 삶은 안정되어 당나라는 더욱 번영하게 된다. 그러나 측천무후도 세월을 이길 수 없었고 차후 이 씨에게 양위하며 권력에서 내려왔다. 무주의 치(武周之治)라 불리며 당나라를 잘 다스렸던 측천무후지만 후대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패자가 되어 권력을 탐하며 색정을 밝히는 잔인한 여자로 묘사되었다.

 

역사의 기록은 승자에 의해 쓰인다.
고려의 권력을 쥔 천추태후는 부국강병을 외치며

고려를 요나라로부터 안전하게 지켰으나
권력을 잃고 음탕한 여자로 기록되었다.
측천무후는 무주의 치라 불릴 만큼 나라를 잘 다스렸으나
왕위를 이 씨에게 다시 물려준 후
잔인무도한 여자로 기록되었다.
역사는 인물들을 실제와 다르게 묘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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