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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교육 식견

진주 유등축제에는 어떤 역사가 숨어있을까?

by JadeWolveS 2023.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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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지역 축제 준비로 바빠져

무더웠던 더위가 어느새 성큼 남쪽으로 물러나 천고마비의 계절이 다가오면 지역마다 축제 준비를 하면서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다. 지역마다 각각의 특색을 살려 홍보하는 데 그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축제가 진주 유등축제이다. 축제를 보기 위해 진주에 가면 촉석루 앞을 흐르는 남강에 비치는 유등의 불빛과 진주 야경에 마음을 뺏기게 된다. 아름다운 진주 유등축제를 즐기며 역사도 알아보자.

 

진주대첩 승리의 발판이 된 유등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2년 조선을 침략한다. 조선은 일본 침략에 준비가 되지 않아 한 달 만에 수도 한양이 왜군 손아귀에 넘어가고 만다. 선조(宣祖)는 평양을 지나 의주까지 도피하여 명군에 원군 요청하고 있었다. 왜군은 각 지역을 장악해 가며 본국에서 원활하지 못한 보급을 조선의 곡창지대 전라도를 장악해서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순탄하게 진행되던 일본의 침략 전쟁은 구국의 영웅 이순신(李舜臣)을 만나면서 전라도의 해상권을 빼앗기자, 육로로 변경하여 진격한다. 그리하여 왜군은 경상도의 전략적 요충지 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김해에서 2만 명을 출병시켰다.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휘하 병사 3,800명 그리고 진주 백성은 진주성에서 왜군에 맞서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남강을 끼고 있던 진주성은 밤에 남강을 통해 왜군이 도강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에 대비하여 조선군은 진주성 주변 남강에 유등을 띄워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왜군은 6일 동안 진주성 공략에 실패하면서 큰 피해를 당하고 패주하였다. 남강에 띄운 유등으로 왜군의 야습을 막을 수 있었고 적은 병력으로 육지 전에 집중하여 왜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천혜의 요새인 진주성은 적은 병력으로 왜군을 막아 전라도 곡창지대를 지키는 역할을 하며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으로 불리게 되었다.

 

왜군의 두 번째 침략에 무너진 진주성

전쟁이 발발한 지 1년 뒤 왜군은 조·명 연합군에 밀려 평양성을 빼앗기고 전방부대의 군량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자 남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의 곡창지대인 전라도 장악이 시급한 상황이 되었고 임진왜란의 승세가 점점 조선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야 했다. 곧 진주성의 복수전이라는 명분으로 9만 6,000명의 왜군이 진주성을 공략한다. 1차 진주성 전투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1차 때보다 더 많은 왜군을 맞아 싸워야 했다. 조선군은 왜군을 상대로 분전하였으나 수적 열세와 열악한 군사 장비로 왜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전멸하였다. 왜군은 진주성을 점령하자 진주대첩 패배의 분풀이로 진주성에 남아있던 일반인 6만 명을 사창에 가둬 모두 불태워 죽였다. 또 왜군은 성안의 가축도 모두 도살하는 바람에 진주성에 살아있는 생명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을이 들어서면서 날씨도 선선해지고
각 지역에서 축제도 많이 열리고 있다.
진주 남강에 띄워진 유등을 보고
진주성에 얽힌 역사 공부도 하면서 축제를 즐기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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