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후손에게 물려줄 것은 과연 '부'일까?
고금리 정책에도 인플레이션이 잡히지 않으면서 고물가가 장기화되며 눈 뜨고 일어나면 기업들 파산 소식이 들리고 있다. 세계 각국은 서로 간의 이해관계로 인해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덩달아 국제정세가 불안해지고 원활한 자원 공급에 문제가 발생하며 각 나라의 산업이 타격받고 있다. 한국 산업도 수입하는 자원의 가격이 급등하며 산업경제가 전반적으로 어려움에 부닥쳐 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자산가들은 후손의 미래를 걱정하여 서둘러 자산을 증여하고 있다. 전문직 고소득자보다 미성년자가 높은 수익을 낸다는 기사를 볼 때 후손에게 부를 대물림하는 것이 과연 그들을 위한 일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재령이씨 운악 이함의 가훈을 살펴보며 현 세태를 곱씹어 보자.
집안의 가훈 "지고 밑져라."
이함(李涵)은 조선 중기 의령 현감을 지낸 인물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곳간의 창고를 열어 백성과 조선을 돕는 명나라 군사에게 나눠 주었다. 당시 임금이었던 선조는 이함의 공을 치하해 벼슬을 내렸으나 나라가 혼란한 시기에 작은 공을 세워 벼슬에 오른 것을 부끄럽게 여긴 이함은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56세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하지만 이함이 과거 급제할 당시 광해군이 왕으로 있었고 조정에 난이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그는 벼슬에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났다. 이함의 삶을 보면 나라가 힘들 때 자신의 곳간을 열었고 국가에서 벼슬을 주었으나 결국 마다하였다. 이함은 자산을 잃었으나 국가에 충성하고 자신이 했던 일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이함은 훗날 그의 후손들에게 "지고 밑져라."라는 가훈을 만들어 가르쳤다. 그리하여 재령이씨 운악 이함의 집안을 명문가로 만드는 토대가 되었고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충효당을 세워 후손에게 뜻 전해
이함은 잠시 벼슬을 그만두고 내려와 후손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 고심하였다. 그는 만권이 넘는 책들을 모아 후손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집안에 건물을 짓고 충효당(忠孝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당시 충(忠)과 효(孝)는 전란을 겪은 조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상이었다. 이함은 현판을 자손들이 볼 수 있는 집 안에 걸어 나라와 가문을 위해 큰일을 하라는 깊은 뜻을 담았던 듯하다. 지금도 서애 류성룡(柳成龍) 생가에는 충효당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이함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대대손손 마음속에 새기도록 만들어 명문가 집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운악 이함은 당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으나
후대에 뛰어난 자손들이 태어나면서
명문가 집안으로 알려져 유명해질 수 있었다.
이함은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지
분명하고 알고 탁월한 식견과 자녀 교육법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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