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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이슈 식견

조선시대 관직보다 인기 많았던 직업은?

by JadeWolveS 2023.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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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가 식어버린 공무원 경쟁률

외환위기를 겪었던 한국 세대는 국가가 부도나도 공무원은 잘리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이후로 공무원 경쟁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노량진에는 공무원 준비생들로 가득 찼고 학원이나 식당에는 자리가 부족 했다. 그러나 현재는 공무원의 처우가 예전 같지 않고 과다한 업무와 기대에 못 미치는 월급 등 다양한 이유로 인기가 식었다. 공무원의 꽃이라 불리는 검사나 5급 공무원조차도 민간기업으로 재취업하고 있다. 과거부터 관존민비(官尊民卑)가 팽배했던 한국 사회는 이제 관비민존(官卑民尊)의 시대로 변화하고 있다. MZ세대는 경직된 공무원 사회 대신 창업하거나 고임금을 주는 민간기업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과거에도 관리직보다 인기가 많았던 직업이 있는지 살펴보자.

동강을 따라 한양에 목재를 옮기는 떼꾼의 시연사진

떼돈을 버는 주인공 떼꾼

'떼꾼'은 산에서 나무를 벌목하고 목재를 운반하는 직업이었다. 조선시대 초기부터 강원도와 충청도는 목재를 공물로 바쳤다. 떼꾼은 무거운 목재가 물에 뜨는 성질을 이용해 강을 타고 한양까지 옮겼다. 떼꾼이 하는 일이 워낙 위험하고 힘든 일이라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한양에는 강원도 동강에서 온 떼꾼들이 넘쳐났다. 그 당시 군수 월급이 20전이었는데 떼꾼은 강원도에서 한양까지 목재를 운반하면 30전을 받았다. 떼꾼이 큰돈을 벌기 시작하자 떼돈을 번다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민이 큰돈을 만지기 위해 농한기에 잠시 떼꾼의 일을 하기도 하였다.

 

여성만 운영권을 가질 수 있었던 채소전

조선은 농경을 중시해서 사람들이 채식 문화가 발달하였을 것이라 여긴다. 그러나 조선은 채소를 심을 땅이 있으면 곡식을 심는 게 낫다고 여겼다. 도성 안에서는 농사지을 수 없었고 땅이 있으면 작물보다는 곡식을 심기 바빴다. 그래서 채소는 한양 근처 큰 고을에 있는 주변 땅에서 키웠다. 그렇게 키운 채소는 도성에 있는 '채소전'이라는 곳에서 팔았다. 채소전의 운영권은 여성만 가질 수 있었다. 한양에서 채소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아 채솟값이 비쌌고 채소전을 운영하는 행수나 채소를 파는 여인에게 괜찮은 돈벌이가 되었다.

 

한국은 과거 조선시대부터 관존민비가 팽배했다.
그러나 공무원은 시대가 변하면서 MZ세대의 외면을 받아 비인기 직업이 되고 있다.
과거 조선 시대에도 말단 관리직보다 돈을 잘 버는 직업이 있었는데
목재를 운반하는 떼꾼과 채소전을 운영하는 여성이 그 대상이었다.
안정성 추구보다는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성이 요구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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