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청랑 인재 식견

조선시대 인조와 관계 깊은 음식은?

by JadeWolveS 2023. 6. 25.
728x90

 

인조의 잘못된 정책으로 휘청인 조선

인조(仁祖)는 조선 16대 임금이다. 왜적의 침입으로 엉망이 된 조선을 수습하던 광해군(光海君)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위협이 되는 왕족들을 죽여야 했다. 광해군의 이런 정책에 불만을 품었던 서인들은 인조를 중심으로 반정에 성공한다. 인조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를 살리기보다는 왕 노릇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조선은 당파싸움으로 나라가 휘청였고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의 품은 신하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평정하자 이번엔 여진족이 침입했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겪어야 했다. 조선은 왜란의 상처가 채 낫기도 전에 내부 반란과 더불어 호란까지 겹쳤다. 나라 살림은 더욱 피폐해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팠다. 그러나 인조의 잘못된 정책으로 백성들이 고단했던 것과는 별개로 후대에 인조와 관련된 음식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16대왕 인조 파주 장릉 출처:두산백과

남녀노소가 즐겨 먹는 인절미 명칭의 유래

인절미는 종묘 제례(宗廟 祭禮)를 지낼 때 올리는 떡이기도 했으며 전국에서 즐겨 먹던 음식이다. 인절미라는 이름의 유래에는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인조는 반정에 성공했으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게 된다. 당시 인조는 충청도 공주 공산성으로 급히 도망쳐 오느라 마땅히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때 임 씨 부자가 흰 떡에 콩고물을 묻혀 인조에게 바쳤다. 인조는 그 떡을 먹고 너무 맛이 좋아 이름을 물었으나 이름이 없다는 말을 듣고 임 씨 부자가 들고 온 맛 좋은 떡이라 하여 '임절미'라 부르게 하였다. 훗날 임절미는 인조가 맛있다고 한 떡이라 바뀌어 '인절미'라 불리게 되었다.

 

며느리를 죽음으로 몰고 간 수라상 전복구이

인조는 광해군이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펼치던 중립 외교 정책을 폐지하고 임진왜란 시절 조선을 도운 명나라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청나라는 명나라를 정복하기에 앞서 후방이 불안해질 위험이 있어 조선을 정복하러 나섰다.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승복하고 말았고 볼모가 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청나라로 보내야 했다. 소현세자와 같이 떠난 세자빈 강 씨는 타지에서 조선의 세자빈으로서 청나라 사람들에게 인정받았다. 마침내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하자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한다. 소현세자는 인조를 찾아뵙고 청나라는 대국이며 배워야 이길 수 있는 상대니, 우호적인 수교를 권했다. 청나라에 굴욕을 당했던 인조는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우호적인 것이 마뜩잖았다. 결국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의문사를 당했다. 세자빈 강 씨도 못마땅했던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이 아닌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세자 책봉에 반발한 세자빈 강 씨는 인조의 미움을 받아 후원의 별당에 감금당한다. 세자빈 강 씨는 별당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인조의 수라상 전복구이에 독을 넣게 사주했다는 터무니없는 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었다.

 
 

반정으로 왕이 된 인조는 잘못된 정책으로 조선을 혼란에 빠뜨렸다.
공신의 반란과 청나라에 굴욕을 겪은 인조는

그때마다 음식과 관련된 일화가 있었다.
인절미 이름의 유래에 담긴 이야기는 재미있으나
수라상에 올라온 전복구이에는
시아버지가 며느리를 죽인 안타까운 이야기가 담겨있다.

 

인조와 관련된 글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아들에게 열등감을 느낀 아버지

자식도 경쟁자로 만든 권력 권력 앞에서는 부모·자식도 없다는 말이 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살펴보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천륜을 저버리는 일들도 비일비재했다. 조선시대 무능한 왕들 밑

jadewolves.tistory.com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