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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인재 식견

조선 전기 천재라 불린 인물은?

by JadeWolveS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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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이 칭찬한 신동

김시습(金時習)은 최초의 한문 소설 작가이자 생육신(生六臣) 중 한 사람이다. 김시습은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이웃에 사는 조선 전기의 문신 최치운(崔致雲)이 그 모습을 보고 "배우면 익힌다"라고 하여 이름을 시습이라 지어주었다. 김시습이 신동이라는 소문은 세종대왕의 귀에 들어가게 된다. 어린 김시습을 불러 시험해 보고 가히 인물이라며 크게 쓰일 인재라 칭찬하고 비단 50필을 주었다. 비단 50필을 혼자 들고 가라고 명을 내리니 어린 시습은 비단마다 매듭을 지어 허리춤에 차고 비단을 가지고 나갔다고 한다. 조선 초기 최고의 천재라 불렸던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이에 반발하여 관직을 떠나 야인으로 살아갔다. 천재였으나 빛을 보지 못했던 김시습의 학습법을 알아보자.

 

조선 문인 김시습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막힘없이 시를 지어내는 어린 천재

김시습은 세 살 때부터 시를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에게 시 짓는 법을 배우자마자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내며 사람들이 탄복하게 했다. 어린 김시습의 시 짓는 능력은 막힘이 없어 조정 대신들도 놀랄 정도였다. 시 짓기는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내용을 함축적인 단어로 표현해야 하는 가장 어려운 문학이다. 어릴 적부터 글자를 통해 다양한 방향으로 생각하여 시를 짓는 습관을 들인 김시습은 뛰어난 지능을 십분 활용하여 여러 가지 학문을 빠르게 학습할 수 있었다. 일례로 허조(許稠)라는 대신이 김시습에게 늙을 '노(老)'를 넣어 시 한 수 지어보라고 하였다. 김시습은 "늙은 나무라도 꽃은 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음이라"라는 시를 지어 올렸다. 나이가 들어가는 허조가 신동 김시습을 보면서 느꼈을 감정을 떠올리며 던진 단어 하나를 김시습은 단번에 알아차리며 멋진 시 한 구절로 노인의 마음을 위로했던 것이었다. 시는 함축적인 단어로 상황을 묘사해야 하기에 아이에게는 어렵다. 하지만 언어도 완벽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시를 지으며 글을 함축하는 방법을 알았고 이는 많은 책을 단기간에 빠르게 흡수하는 비결이 되었다.

 

조선팔도를 답사하며 견문을 넓히다

김시습은 세조가 즉위하자 관직에 미련을 버리고 개성 송도를 시작으로 관서 지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발이 닿는 대로 걸으면서 느끼는 감정을 시로 지어 시집을 만들었다. 방랑 시인으로 살았던 김시습은 경주 금오산에 터를 잡고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쓰기 시작했다. 김시습은 조선의 다양한 곳을 둘러보면서 허송세월했던 것이 아니라 견문을 넓히고 다녔다. 주자가 말하던 "견문이 넓은 사람일수록 안목이 좁은 사람은 없다"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본 것들은 금오신화에 상상력을 가미하는 소재로 하나씩 쓰이며 후손에게 전해졌고 극찬받는 작품이 되었다.

 

 

조선 전기 천재 김시습은 어릴 적부터 시 짓기를 시작하여
상황과 감정을 함축된 단어에 담는 연습을 꾸준히 하였다.

시 짓기는 많은 책을 빠르게 흡수할 수 있는 비결이 되었고
후일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히고
금오신화라는 위대한 작품을 쓰는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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