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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이슈 식견

조선 최초의 남, 여 양의사는 누구였을까?

by JadeWolveS 2024. 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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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대 정원 확대 반대하는 의사 협회

한국은 출생률이 낮아지며 인구감소와 함께 고령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젊은 의료 인력은 자녀 교육과 편의성을 이유로 대도시에 몰려 자리 잡았고 지방 도시에 필수 의료 인력이 부족한 문제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그 대안으로 정부는 1년에 3천 명을 뽑는 의대 정원을 추가로 2천 명 늘려 총 5천 명으로 확대할 방침을 내놓았다. 의사협회는 의대 정원 확대가 지방 필수 의료 인력 부재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단체 움직임을 시사하고 있다. 환자의 목숨을 담보로 파업까지 예고하자 국민은 의사 집단이 자기 밥그릇 지키기 위한 행보라 여기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최고의 직업 중 하나인 의사. 과거 최초 양의사의 삶은 어땠는지 살펴보자.

제중원 1기 졸업생 박서양

백정 출신 양의사 박서양

박서양(朴瑞陽)은 백정 집안에서 태어났다. 백정(白丁)은 조선시대에 가축을 잡는 직업으로 거지보다 천한 직업이었다. 갑오개혁(甲午改革) 이후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박서양에게 백정 출신 딱지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 박성춘(朴成春)은 자신을 진료해 주던 제중원(濟衆院) 원장 에비슨(O.R. Avison)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자기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에비슨은 박성춘의 요구를 받아들여 박서양을 제중원으로 데려갔다. 에비슨은 그가 끈기 있는 사람인지 알기 위해 허드렛일을 시켰다. 박서양은 귀한 양반집 자제들과 달리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해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에비슨은 본격적으로 박서양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6명의 조선인에게 의사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당시 조선에서 양의학이 인정받으면서 그들은 환자를 치료하며 돈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박서양은 스승이 가르쳐준 의사의 소명을 기억했다. 그는 환자들을 돌보며 교육에 힘썼다. 조선이 일제 치하에 놓이자, 간도로 넘어가 구세 병원을 세워 환자를 치료했고 학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유명한 봉오동 전투에서도 독립군을 치료하는 군의관으로 활동했다. 에비슨은 어느덧 중년이 된 박서양을 보러 간도까지 찾아 갔지만 제자를 보지 못하고 캐나다로 떠났다. 스승과 약속이 잡혀있었지만, 그 사이 박서양이 환자 치료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환자를 보러 떠났고 스승과의 만남은 불발되었다.

 

조선 최초 여자 양의사 김예스더 남편 성을 따라 박예스더라고 불림

조선의 여인들을 위한 양의사 박에스더

박에스더는 김점동에서 개명한 이름이다. 아버지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였고, 가난했던 그의 집안은 생계가 어려워졌다. 부친은 숙식이 해결된다는 이화학당에 박에스더를 보냈다. 그곳에서 그녀는 한글, 한문, 지리, 수학, 영어들을 배웠다. 이화학당을 운영하던 메리 스크랜튼(Mary Scranton)은 조선 여인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교내에 설립했다. 조선 최초의 여성 병원인 '보구여관'에서 미국인 로제타 셔우드(Rosetta Sherwood Hall)가 진료를 시작하려 했다. 그녀는 한국어를 전혀 할 줄 몰랐기에 영어를 잘하는 박에스더에게 통역과 진료 보조를 맡겼다. 박에스더는 로제타 곁에 있으며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로제타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려 하자 박에스더는 자신을 미국에 데려가 줄 것을 요청했다. 로제타는 그녀의 의사가 되려는 의지를 알고 있었기에 미국으로 데려갔다. 박에스더는 미국에서 뉴욕 리버티의 공립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에 정진했다. 사력을 다하고 주변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최연소로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난한 조선 여인은 낯선 타지에서 한 살배기 딸과 남편의 죽음을 마주해야 했다. 큰 상실감에 쌓인 채 그녀는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의사가 되고자 한 그녀의 간절함은 모든 시련을 이겨낼 힘이 되었다. 의사가 되어 한국에 돌아온 그녀는 아픈 환자들을 진료하는데 바쁜 하루를 보냈다. 전염병이 도는 지역도 마다하지 않고 당나귀를 타고 진료를 다녔고 그녀는 건강이 악화되며 병을 얻어 삶을 마감했다.

 

조선 최초로 양의사가 되었던 박서양과 박에스더는
아픈 환자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의사들이었다.
자신의 직업으로 돈방석에 앉기보다
자기가 받은 혜택을 가난한 조선인 백성들에게 나눠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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