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받던 영재, 과학고에서 자퇴해
백 군은 2012년 1월생으로 올해 만 10살이며, 한 방송사의 영재 발굴 프로그램에 출연해 천재 어린이로 이름을 알렸다. 3년 만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한 지 1년 만인 올해 초 서울과학고등학교에 조기 입학했으나 최근 자퇴서를 냈다. 자퇴를 한 이유는 어린아이가 동급생과 어울리지 못했고 입시를 준비하는 과고 학생들과 영재인 백군을 같은 교육체제에 두고 가르치는 데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였다. 백군은 공식을 암기하고 문제를 푸는 기계가 되어간다고 느끼며 배우는 즐거움이 어느새 고통으로 바뀌어 있었다. 한국의 영재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깨닫고 발견하도록 만들어줘야 할 곳이 없다는 사실도 아쉽지만, 그런 과정을 이겨낼 힘이 없는 부분도 아쉬운 점이다. 조선 시대 천재들도 이런 고민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성리학 사상과 반대 견해를 제시한 윤휴
윤휴(尹鑴)는 조선시대 중기의 유학자로 북인 출신인 부친과 외조부의 실용적인 학문에 대한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당시 조선은 공자의 사상을 이어 주희(朱熹)가 성립한 성리학이 사대부들 사이에 주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윤휴는 주류인 성리학 사상에 반하는 주장을 많이 펼쳤다. 특히 그는 청나라에 명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이 청나라를 정벌할 기회라 여기며 북벌을 주장하였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호포제(戶布制)를 통해 사대부에게도 세금을 걷으려 하였다. 그러나 시대를 앞선 윤휴의 사상은 조선시대에 이단으로 여겼으며 훗날 윤휴는 사상을 어지럽힌다는 죄 같지도 않은 죄명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이 윤후 같은 천재의 의견을 받아들여 북벌을 준비하고 사대부들에게도 세금을 거둬들였다면 새로운 조선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노론을 비판해 이단아 취급받은 박세당
박세당(朴世堂)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당시에 대세였던 노론에 비판적인 의견을 냈던 학자였다. 노론이 주장하는 사상 이외에는 이단아 취급을 하던 시대에 박세당은 권력에 굽히지 않고 자기 생각들을 거침없이 조정에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을 좌지우지하는 송시열(宋時烈)의 눈 밖에 나게 되었고 박세당은 관직에서 물러나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관직을 거절할수록 박세당은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그는 내각에 관련된 직을 받으면 거절하였으나 지방직을 받으면 나아가 최선을 다하였다. 이후 박세당은 자기 집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며 "색경(穡經)"이라는 농업과 관련된 백과사전을 저술하였다. 또 그는 농업이 국가의 근간이 된다는 중농주의 실학사상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박세당의 아들 박태후가 권력투쟁에 휘말려 박세당도 큰 고초를 치르고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뛰어난 천재들도 획일화된 사상과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정치적으로 희생당했다.
그 결과 조선은 뛰어난 인재들을 잃고 말았다.
한국도 뛰어난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그들이
재밌게 배우고 성장할 공간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아닐까?
천재에 관한 글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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