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침략만 기록된 역사
유구한 역사 속 한반도는 비옥한 토지를 가지고 있어 고대부터 왜적들의 약탈 대상으로만 알려져 있다. 고려말에는 남·서·동해안을 포함해 내륙 깊숙한 곳까지 왜구가 자주 출몰해서 골칫거리였다. 특히 조선 선조 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큰 전쟁에 시달렸고 조선 말기에는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 지배를 받기까지 했다. 한반도가 일본에 침략당하기만 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일본도 신라 때문에 근심이 깊었던 때가 있었다. 신라와 일본 간 대립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통일 신라 침략에 전전긍긍한 일본
4세기경 신라는 강대국 고구려와 백제를 국경에 두고 있어 그들을 상대하기도 벅찬 상태였다. 왜구는 후방에 군사력이 약해진 틈을 타 가야국과 손잡고 신라 수도 경주까지 쳐들어왔다. 신라는 이들을 막아낼 병력이 없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고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모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신라는 힘을 키워 백제,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남북국 시대를 열었다. 국력을 일신한 신라는 진흥왕, 진평왕 때에 일본을 공격하였고 태종 무열왕 시절에는 일본의 대마도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다. 이후 통일신라 성덕왕 시절에 현재의 미야자키현과 일본의 서쪽 변방을 718년과 720년에 각각 한 번씩 총 두 차례 공격했다고 한다. 신라도 과거에 당한 치욕을 씻고자 이를 갈고 일본 공략에 나선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도 변방의 경계를 강화하며 침략에 대비하면서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다.
'신라구' 침략에 규슈 일대 주민 아우성
9세기경부터 신라는 반란으로 중앙 정부의 힘이 취약해졌다. 각 지방의 호족은 이 틈을 타 독자적인 세력을 쌓아갔다. 호족 간 싸움에 백성들도 살기 어려워지자 해적이 되는 경우까지 생겼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신라 지방 호족의 지원을 받아 해안지방에 신라 해적인 ‘신라구(新羅寇)’가 많이 생기면서 일본을 침탈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포로로 잡혔던 신라구 현춘에 의하면 해적들의 배가 2,500척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는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수군과 맞먹는 군사력. 신라구의 빈번한 침입 때문에 대마도와 규수 일대 주민들은 사람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을 칠 정도였다.
고대부터 한반도는 왜구의 빈번한 침략에 골치를 앓고 있었다.
특히 신라는 가야국과 손잡은 왜구의 침략을 받아 수도 경주가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신라에는 신라 해적인 신라구가 있었다.
신라 말기 중앙 정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호족의 지원을 받은 신라구는 대마도와 규수 일대를 대대적으로 침범,
주민들을 괴롭혔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우리가 잘 모르는 신라 해적의 역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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